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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상식

경제대공황 그리고 뉴딜정책, 브레튼우즈체제- 달러 기축통화!

by 모찌하을 2023.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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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대공황

1920년대 미국의 호황기 그리고 경제대공황의 시작

 1차 세계대전(1914-1918)과 2차 세계대전(1939-1945)을 거치면서 이전에 기축통화역할을 했던 영국의 파운드화가 몰락하고 미국의 달러화가 기축통화로 부상하였습니다.

 1914년 미국 연방준비은행(Fed)이 설립되었고,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 식량, 무기를 수출하면서 미국경제는 호황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전기를 이용한 대량생산체제인 2차 산업혁명을 바탕으로 1920년대 미국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뤘습니다. 1926년 미국은 전 세계 금의 45%를 보유하기에 이르렀으며 당시 미국 내 무역 금융의 절반이상이 달러화로 결제되었고 미국 밖에서도 상당 부분 달러화로 결제되었습니다. 미국은 1920년 경제호황기로 고용, 소득, 소비가 증가하며 특히 미국자동차회사들은 세계시장 80%를 차지할 만큼 호황을 이룹니다.

 그러나 경제의 규모가 커지고 발전하는 만큼 기업의 투자도 늘어나지만 그만큼의 소비가 받쳐주지 않아 공급과잉현상이 발생합니다. 당시 미국의 상위 0.5%로가 부의 1/4를 소유할 정도로 빈부격차가 컸고 소비의 중심인 상류층 소비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공급대비 수요부족으로 계속 재고가 쌓이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동차나 고가전자제품을 중심으로 할인판매를 하기 시작하여 소비를 진작시킵니다. 정부에서는 할부제도를 도입해 수많은 사람들이 빚을 내어 할부 상품을 구매하도록 권장합니다. 

 또 당시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유럽 주식투자로 많은 부를 추척하면서 주식붐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주식에 투자하면 은행에서 10배의 돈을 대출해 줄 정도로 주식 시장은 투기시장으로 변질되고 있었습니다. 실물경제는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데 부동산시장과 주식시장은 실제 가치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거래되면서 거품이 끼기 시작하고 가계대출에 대한 부담이 커지게 됩니다. 대외적으로는 자국금융자본시장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지나치게 경쟁적으로 대유럽대출을 확대하였었습니다. 이러한 요인들이 경제대공황의 원인들로 작용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빈부격차는 커지고 대출 부담이 증가하면서 소비가 위축되고 경기가 얼어붙기 시작합니다. 해외투자자들은 조금씩 주식시장을 빠져나가고 미국 내 투자자들 역시 주식시장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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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정책

경제대공황, 그리고 뉴딜정책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뉴욕증시가 대폭락 합니다.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주식에 투자한 100억 달러가 사라지고 한 달 만에 다우지수도 반토막이 되어버립니다. 이에 목숨을 끊는 투자자들이 생기고 수많은 회사가 파산하며 패닉상태에 빠졌고 미국경기는 침체기에 들어섭니다. 주식의 경우 약 3년 동안 시가총액의 90%가 증발하며 뱅크런 사태로 은행도 6000여 곳이 파산합니다. 1933년의 실업률은 자그마치 25%에 달하게 됩니다. IMF 당시 우리나라 실업률이 7%인걸 감안하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미국의 GDP의 30~40% 정도가 증발해 버렸습니다. 당시 유럽국가들은 주로 미국 자본의 수출, 수입에 의존했기에 미국의 경제대공황은 전 세계대공황으로 확산하게 됩니다. 

  193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등장하며 기준의 자유방임주의정책과 다르게 정부개입형 뉴딜정책(1933년)을 발표합니다. 대공황의 원인을 과도한 공급보다는 충분하지 않은 수요가 문제라는데 초점을 두고 정책을 펼칩니다. 제일 먼저 뱅크런(달러, 금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은행문을 닫아버립니다. 정부는 금리를 인하하고 화폐공급을 늘리는 확장정책을 시행합니다. 공공사업을 확대하여 노동자의 일자리를 구제해 주고 소득 재분배를 하는 등 경제에 직접 개입하여 경제를 부양시켰습니다. 이런 뉴딜정책을 통해 미국경제와 사회는 1930년대 후반에 들어와 서서히 회복합니다. 그러나 1938년 대규모 공공사업으로 인한 재정적자로 다시 불경기가 찾아옵니다. 하지만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터진 후에 군수 경기와 식량등을 수출하며 미국경기가 다시 살아나서 서서히 안정을 찾게 됩니다. 

 

 

 

 

 

 

 

브레튼우즈

미국, 달러-기축통화로 세계경제 중심이 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무역을 통해 다시 전쟁으로 생산시설이 파괴된 유럽을 대신해 전 세계 산업 생산의 50%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달러화만이 가치절하 우려 없이 안전하게 금과 교환될 수 있었습니다. 1944년 44개국의 연합국이 미국의 휴양도시 브레튼 우즈에 모여 금 1온스당 35달러 고정활율로 미국의 달러에 기축통화 지위를 부여합니다. 미국이 자국 달러를 기축통화로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미국이 전 세계 2/3 이상의 금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금본위제와의 차이점은 미국만이 유일하게 금 태환을 할 수 있는 국가였으며 그 외 국가들의 통화는 모두 달러를 통해 금과 연결되었습니다. 브레튼 우즈에서 IMF(국제통화기금),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등 국제기구가 설립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브레튼 우즈 체제 이후 달러화는 기축통화로의 자리를 확고히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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